A Story of Rev. Sekita Hiroo

2018년 6월 2일_세키타 히로오 목사님과의 인터뷰
<복음과 상황> 2014년 7월호 “철거 위기 교회에서 마지막 한 사람까지”
[284호 편들고 싶은 사람] 가와사키도테교회 손유구 목사 이야기에서…이범진 기자

도테교회와의 만남

그런 손 목사가 28세 때 신학교(농촌전도신학교)에 들어가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정확히 말하면 신학교에서 만난 세키타 히로오 교수가 그를 이곳 도테교회로 데려오면서부터다. 세키타 교수는 도테교회를 세운 목사이기도 하다. 

– 도테교회의 첫인상은 어땠나?
23년 전, 1991년에 이 동네에 처음 왔다. 스물여덟 살 때였다. 당시 이 동네에는 많은 코리안이 살고 있었고, 공장도 많았다. 당시 이웃끼리 “엄마” “아버지”라는 말이 길거리에서도 자유롭게 오갔다. 다른 일본 지역에서는 보기 어려운 친근한 모습이었다. 나도 재일동포가 많은 오사카에서 살았지만, 한국말을 밖에서 서슴없이 사용하는 경우는 없었다. 도테마을엔 필리핀이나 베트남 사람도 있었고, 북쪽과 남쪽의 사람이 서로 어울렸다. 서로 배척하거나 특별히 더 배려하는 것 없이 친하게 지냈다. 동네 밖 일본인들과는 때때로 다툼이 있었지만 우리끼리는 싸우지 않았다. 민족과 관계없이 인간이기 때문에 서로 잘 지냈다. 내가 그동안 일본인처럼 살려고 던져버렸던 것이 이곳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는 점이 놀라웠다.

– 도테교회의 시작이 궁금하다.
이 지역에 대한 설명부터 해야 할 것 같다. 과거에 가와사키 지역은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정치도시인 도쿄, 무역도시인 요코하마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만 언급될 뿐이었다. 그러다가 전쟁하는 동안에 큰 군수업체 공장을 이곳에 많이 유치해 중공업 도시가 되었다. 한국전쟁 때도 이 지역에서 만든 포탄이 무기로 쓰였다. 그 전쟁 때 부유한 동네가 되었다. 중공업에 종사하고자 외국인들이 가와사키에 많이 들어왔고, 그때 코리안들도 많이 와서 살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한국전쟁에 대해서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다. 고국의 희생으로 이룬 부유함으로 인생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안에서도 이 도테지역은 사람이 살아서는 안 되는 지역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둘 강가에 정착하면서 하나의 슬럼가를 이룬 지역이다. 정상적인 과정으로는 시가지에 살 수 없었던 이들이 여기 도테에 마을을 이룬 것이다. (1959년 이세완 태풍 이후 3~4년 사이 100가구가 형성되었다. 행정을 피해 토요일과 일요일에 집을 지었다.) 이때 세키타 목사가 도테마을을 알게 되었고 교회를 세우게 된 것이다.  

– 세키타 히로오 목사는 어떤 분이셨나? 왜 이곳에 교회를 세우신 건가?
그는 일본그리스도교단 소속 목사님이었다. 교단이 1967년에 일본인이 전쟁에 가담한 죄를 회개하는 ‘전쟁 책임 고백’을 했고, 여기에 감명을 받아 자기 인생을 전쟁 가해자의 입장에서 속죄하고 보상하는 데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2차 대전 때 세키타 목사는 ‘군국소년’이었다.) 그는 교회를 지을 때 전쟁에 대한 책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지금 우리 교단은 우경화되어서 전쟁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쪽은 늘 약하지만, 세키타 목사님은 “잘못했다”라는 말로 끝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실천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쟁 중 조선에서 일본으로 들어온 사람들과 일본인들이 다 같이 함께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사상이 지금의 도테교회의 모태가 되었다.

사실 지금의 교회는 당시 도테마을의 김만수 할아버지에게 산 것이다. 도테마을 안으로 들어오기 전, 세키타 목사는 도테마을 밖에서 사역하고 있었다. 교회를 도테마을 안으로 옮기려고 하자, 교인들이 들고일어났다. 왜 불법지역의 불법건물을 사서 교회를 옮기느냐는 불만이었다. 세키타 목사는 단호했다.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교회가 안전지대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변두리로 가야 합니다. 나 혼자 안전지대에 살면서 어떻게 변두리에 있는 사람을 만납니까? 내가 변두리로 가야 합니다.”

반대를 무릅쓰고 불법점거지역 도테마을 안으로 들어왔다. 기존 교인 50퍼센트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교회를 떠났다. 1977년의 일이다. 세키타 목사는 교회활동은 물론 도테활동센터를 세워 도테마을 사람들의 수해를 지원하거나 취직 차별 문제를 해결하는 등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손유구 목사는 도테교회의 세 번째 목사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를 맡기까지는 적잖은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해야 했다. ‘일본인’으로 살아온 그에게 신학교에서 만난 재일동포들과 도테교회 사람들은 그를 ‘조선’과 다시 이어준, 변두리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이다.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 For Full Text Article
http://www.goscon.co.kr/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28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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